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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규 무네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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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규 무네요시는 1529년 야마토국에서 태어난 무사로, 신카게류 검술의 달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검술과 학문에 정진했으며, 1544년 쓰쓰이 준쇼의 야규성 공격에서 활약했다. 이후 마쓰나가 히사히데를 섬기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신카게류의 가미이즈미 노부츠나를 만나 무토도리를 익혔다. 말년에는 야규 마을에 은거하며 신카게류를 가르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검술을 선보여 아들 무네노리가 이에야스의 가신이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천하 병법의 대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검술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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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규 무네요시
기본 정보
이름야규 무네토시
본명야규 신스케 무네토시
다른 이름세키슈사이, 야규 신자에몬, 야규 타지마노카미, 야규 무네요시
출생일1529년
출생지야규, 야마토 국
사망일1606년 5월 25일
사망지야규, 야마토 국
무술 유파신카게류
스승카미이즈미 노부츠나
제자야규 무네노리, 야규 토시토시, 타케다 우지카츠
일본어 표기
씨명柳生
이름宗厳
로마자 표기Yagyū Munetoshi
생애
시대전국 시대 - 에도 시대 초기
출생다이에이 7년 (1527년)
사망게이초 11년 4월 19일 (1606년 5월 25일)
별명신스케, 신자에몬, 세키슈사이
계명호도쿠인덴 코단슈시시 소운소겐 코지
묘소주구지
호도쿠지
주군쓰쓰이 준케이, 마쓰나가 히사히데도쿠가와 이에야스
씨족야규 씨
부모아버지: 야규 이에카타
형제쇼긴안
오쿠하라 스케토요 딸・나베 (슌토우고젠)史料 柳生新陰流〈上巻〉수록 『옥에이줍이(二)』. 해당 위치는 p.60
자녀요시카쓰, 히사사이, 도쿠사이, 무네아키, 무네노리

2. 생애

신음류 병법목록사/보산사 소장


방덕사


야규 무네요시는 1563년 신카게류(新陰流)의 창시자 가미이즈미 노부츠나(上泉信綱)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27] 무네요시는 노부츠나를 야규 마을로 초대하여 1년 가까이 수련했다. 이후 노부츠나는 무네요시에게 무장한 상대에게 무기를 들지 않고 맞서는 무투도리(無刀取) 과제를 주었다. 무네요시는 이 연구에 전념하여 노부츠나가 돌아왔을 때 그 기술을 시범 보였다. 노부츠나는 무네요시에게 신카게류 최고의 경지를 나타내는 인가장(印可状)과 가르칠 권한을 주었다.[4][5] 1년 후, 노부츠나는 신카게류의 가타(型)를 자세히 설명한 『카게모쿠로쿠(陰流目錄)』를 주었다.[4]

1568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야마토국(大和国)에 진입하여 마쓰나가쓰쓰이 측을 평정했다. 노부나가는 무네요시에게 교토로 가서 쇼군(将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섬기라고 명령했다.[3] 그러나 요시아키는 노부나가를 타도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고, 1573년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몰아냈다. 1577년 마쓰나가가 다시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패배하면서, 무네요시는 전투에서 물러나 야규 마을에 은둔했다.[3]

1570년대 후반, 무네요시는 야규 마을로 은퇴하여 신카게류 훈련에 전념했다.[5] 아시카가 막부와 마쓰나가의 몰락 등이 원인이었을 수 있다. 무네요시는 아들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신카게류를 가르쳤다.[63] 1593년에는 불교 재가 수행자가 되어 "석수재 종곤(石舟斎宗厳)"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1594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충실한 장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무네요시의 실력을 알고 만남을 주선했다. 무네요시는 아들 무네노리와 함께 시범을 보였고, 이에야스는 보쿠토를 들고 무네요시에게 무토도리를 시연해 줄 것을 요청했다. 무네요시는 이에야스의 보쿠토를 날려 버리고 이에야스를 넘어뜨렸다.[5] 이에야스는 무네요시에게 신카게류를 가르쳐 줄 것을 요청했으나, 무네요시는 고령을 이유로 아들 무네노리를 추천했다. 같은 해, 야마토국의 인구 조사에서 야규 마을에 숨겨진 비과세 논이 발견되어 무네요시의 토지는 몰수되었다.[3][6]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무네노리를 통해 무네요시에게 야마토 지방에서 군대를 모을 것을 요청했다. 71세의 무네요시는 직접 군대를 이끌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무네노리가 군대를 이끌고 이에야스에게 합류했다.[1] 이에야스의 군대가 승리하면서 야규 가문은 선조 대대로 내려오는 땅을 되찾았다.

1606년, 건강이 악화된 무네요시는 가미이즈미 노부츠나로부터 받은 전승 면허와 삽화가 그려진 두루마리를 포함한 모든 신영류 자료를 손자 야규 토시토시에게 물려주었다.[1] 같은 해, 야규 세키슈사이 타이라노 무네토시는 78세의 나이로 야규 마을에서 사망했다.

2. 1. 출생과 초기 활동

야규 무네요시는 1529년 야마토국(大和国) 야규 마을(현재의 나라현(奈良県) 야규정(柳生町))에서 야규 신스케(柳生新介)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에토시(家利)는 소규모 지주였다.[1] 12세 때, 무네요시의 아버지 이에토시는 기사와 나가마사(木沢長政)와 함께 미요시 나가요시(三好長慶)의 세력에 맞서 싸웠으나, 기사와가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야규 가문은 수세에 몰렸다. 야마토국의 절반 이상을 장악한 미요시는 쓰쓰이 준쇼(筒井順昭)에게 나머지를 정복하도록 했다.[1]

쓰쓰이 가문과 야규 가문은 이전부터 불화가 있었고, 1544년 준쇼는 약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야규성(柳生城)을 공격했다.[2] 고후쿠지(興福寺)의 연대기인 「다몬인 일기(多聞院日記)」에 따르면, 야규 가문은 처음에는 기습을 당했지만 이에토시가 군대를 규합하여 방어전을 펼쳤다. 당시 15세였던 무네토시는 자신의 소규모 부대를 능숙하게 지휘했다. 쓰쓰이 군은 성을 포위하고 주변을 불태웠으며, 외성을 장악하고 급수를 차단했지만 본성은 여전히 버텼다. 야규 가문은 사흘 동안 버텼지만,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 굴복하여 쓰쓰이에게 항복했다.[1]

이후 야규 가문은 8년 동안 쓰쓰이 가문을 섬겼다. 무네토시는 무예와 교양을 닦아 창(やり)과 일본도(日本刀)에 능숙해졌을 뿐만 아니라 유교(儒教), 선종(禪宗), 진언종(真言宗)을 공부했다.[1] 무네토시는 곧 뛰어난 무사이자 지휘관으로 인정받았으며, 쓰쓰이 준쇼의 아들 쓰쓰이 준케이(筒井順慶)는 이에토시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무네토시를 칭찬하기도 했다.[3]

1559년, 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는 쓰쓰이 가문을 공격하면서 무네토시에게 협력을 요청했고, 야규 가문은 마쓰나가 휘하에서 부상했다. 특히 마쓰나가는 도우노미네(鳥見峰) 전투에서 무네토시의 공적을 표창했다. 무네토시는 후위에서 싸우며 군대의 퇴각을 엄호했고, 부상을 입었지만 창으로 적들을 여러 명 죽였다. 무네토시는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마쓰다 무네시게(松田宗茂)라는 가신이 목숨을 바쳐 그를 구했다.[3]

무네토시가 어떤 무술을 배웠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오와리(尾張) 야규 가문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간토리 신주로(間鳥新十郎)에게 천신쇼덴 가토리 신토류(天真正伝香取神道流)를 배웠다고 한다.[4] 에도(江戸) 야규 가문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추조류(中条流)의 한 갈래인 토다류(戸田流)를 배웠다고 한다.[5]

2. 2. 마쓰나가 가문 섬김

야규 무네요시의 아버지 야규 무네토시는 마쓰나가 야스히데(松永久秀) 휘하에서 활약했다. 1559년 야스히데가 야마토국(大和国)을 침공했을 때, 무네토시는 주군 쓰쓰이 준케이(筒井順慶)에게 반기를 들고 야스히데에게 투항했다.[19]

1562년 3월, 야스히데가 속한 삼요시 가문이 구메다 전투(久米田の戦い)에서 패배하자, 무네토시는 타몬산성(多聞山城)에 구원군으로 참가하여 반(反) 삼요시 세력에 대항했다. 야스히데는 무네토시의 구원에 기뻐하며, 자신은 도요가이(鳥養, 지금의 오사카부 셋쓰시)에 진을 쳤다고 알리며 “약자들”이 적에게 성을 내주어도 즉시 토벌할 것이니 안심하라고 격려했다.[20]

같은 해 5월 교쿄지 전투(教興寺の戦い)에서 삼요시 가문이 승리할 때까지, 야스히데는 무네토시가 배신하지 않도록 군사 정세를 알리는 등 격려하는 편지를 보냈다.[21] 무네토시는 야스히데의 신임을 얻어 그의 측근이 되었고, 취차로서 삼요시 가문 중추로의 사자 역할도 맡았다.

1563년 정월 27일, 무네토시는 야스히데를 따라 타부오(多武峯)를 공격했다.[23] 이 전투에서 야스히데 측은 패배했지만, 무네토시는 “창을 휘둘러 여러 명”의 목을 베었다는 공으로 “이전에는 비할 데 없는 공적”이라며 야스히데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24]

같은 해 6월 16일, 무네토시는 야스히데의 친필 편지로 예전에 쓰쓰이 가문을 섬겼을 때 얻었던 백토의 대지로 아키노 분(秋篠分, 지금의 나라시)을 받아[25] 야스히데와의 주종 관계를 강화했다. 같은 달 삼좋장경(三好長慶)의 적남(嫡男) 삼좋요시오키(三好義興)가 병에 걸리자, 무네토시는 야스히데로부터 편지를 받고, 의흥의 병세를 은폐하려는 주군의 생각을 삼요시 가문 중신 이와나리 토모미치(岩成友通)에게 전했다. 이처럼 이 시기 무네토시는 삼요시 가문 차기 당주가 위독하다는 기밀 정보도 맡고 있었고, 야스히데에게 가장 신임받는 가신으로 대우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6]

1568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야마토국에 진입하여 마쓰나가와 쓰쓰이 측을 평정했다. 이 무렵 무네토시는 야규 가문의 지휘권을 무네요시에게 넘겨주었을 가능성이 높다.[3]

1571년, 야마토국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확보하려던 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는 나라(奈良)의 다쓰이치(辰市)에서 쓰쓰이 준케이를 공격하기 위해 야규 가문을 파병했다.[3] 이 공격은 실패했고, 전투 중 무네요시의 장남 도시카쓰(利勝)가 엉덩이에 총상을 입어 평생 장애를 갖게 되었다.

1577년 마쓰나가가 다시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고, 노부나가는 결국 그의 반역적인 가신을 패배시켰다.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 무렵 무네요시는 전투에서 물러나 야규 마을에 은둔했다.[3]

2. 3. 신카게류 입문

1529년 야마토국(大和国) 야규 마을(현재 나라현(奈良県) 야규정(柳生町))에서 태어난 야규 무네토시(柳生宗矩)는 소규모 지주였던 아버지 이에토시(家利)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무예와 교양을 닦았다. 유교(儒教), 선종(禪宗), 진언종(真言宗)을 공부하였고, (槍)과 일본도(日本刀)에 능숙해졌다.[1]

무네토시가 어떤 무술을 배웠고 누구에게 사사받았는지는 완전히 명확하지 않다. 오와리(尾張) 야규 가문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간토리 신주로(間鳥新十郎)라는 사람에게 천신쇼덴 가토리 신토류(天真正伝香取神道流)를 배웠다고 한다.[4] 그러나 “간토리”는 간자의 잘못된 해석일 가능성이 있으며, “가토리(香取)”를 의미하여 “가토리 신토류”를 가리킬 수 있다. 에도(江戸) 야규 가문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추죠류(中条流)의 한 갈래인 토다류(戸田流)를 배웠다고 한다.[5]

1563년, 신카게류(新陰流)의 창시자로 유명한 무예가 가미이즈미 노부츠나(上泉信綱)와 그의 문하생 일행이 교토로 가는 길에 나라(奈良)에 들렀다. 무네요시는 가미이즈미 노부츠나(上泉信綱)를 찾아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27]

입문 경위에 대해 무네요시의 증손자인 야규 토시카타(柳生利方)가 남긴 『신음류병법유래(新陰流兵法由来)』에 따르면, 무네요시는 가미이즈미 노부츠나(上泉信綱)와 직접 시합을 원했으나, 가미이즈미 노부츠나(上泉信綱)는 먼저 제자인 스즈키 이헤쿠(鈴木意伯)와 겨루도록 했다. 무네요시는 여러 차례 시합을 했지만, 자신보다 2치(寸) 짧은 죽도(竹刀)를 사용하는 이헤쿠에게 참패했다.[27] 그러나 이 시합 내용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있으며, 에도 시대 중기에 저술된 『무공잡기(武功雑記)』에서는 상대를 가미이즈미 노부츠나(上泉信綱)의 제자 히키타 가게카네(疋田景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오와리번의 사료를 편찬한 『나고야시사(名古屋市史)』나 토시카타(利方)의 자손이 쓴 『정전신음류(正伝新陰流)』처럼 가미이즈미 노부츠나(上泉信綱)가 직접 상대를 맡았다고 하는 기록도 있다.[28]

어찌되었든 가미이즈미 노부츠나(上泉信綱)가 창안한 신카게류에 완패한 무네요시는 자신의 미숙함을 깨닫고 즉시 사사(師事)하여, 가미이즈미 노부츠나(上泉信綱)를 야규쇼(柳生庄)로 초청하여 그의 검술을 배웠다.

이듬해 1564년, 가미이즈미 노부츠나(上泉信綱)는 "무도취(無刀取)"의 공안(公案)을 무네요시에게 맡기고 야규쇼를 떠나, 애초의 목적이었던 교토로 향했다. 1565년 4월에 다시 가미이즈미 노부츠나(上泉信綱)가 이헤쿠와 함께 야규쇼를 방문했을 때, 무네요시는 가미이즈미 노부츠나(上泉信綱)에게 자신이 연구한 무도취를 선보였다. 가미이즈미 노부츠나(上泉信綱)로부터 『일국일인인가(一国一人印可)』를 받았고, 같은 해에는 세 번째로 야규쇼를 방문한 가미이즈미 노부츠나(上泉信綱)로부터 『신영류목록(新影流目録)』을 받았다고 한다.[29]

2. 4. 오다 노부나가와의 관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1568년 압도적인 병력으로 야마토국에 진입하여 마쓰나가쓰쓰이 측을 평정하고 그들의 소규모 전투를 종식시켰다. 이 무렵 이에토시(家利)가 은퇴하고 야규 가문의 지휘권을 무네요시에게 넘겨주었을 가능성이 높다.[3] 노부나가는 무네요시에게 교토로 가서 새로운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시중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몇 년 후 요시아키는 노부나가를 타도하기 위해 동맹을 맺기 시작했는데, 그들 중에는 야규 가문의 옛 주군이자 현 지휘관인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센고쿠 다이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 포함되어 있었다. 1571년, 야마토국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확보하려던 마쓰나가는 나라의 다쓰이치에서 쓰쓰이 준케이를 공격하기 위해 야규 가문을 파병했다.[3] 이 공격은 완전히 실패했고, 전투 중 무네요시의 장남 도시카쓰(利勝)가 엉덩이에 총상을 입었다. 이것은 그가 첫 전투에서 입은 이전 부상과 더해져 평생 장애를 남겼다.

요시아키의 연합군은 1573년 노부나가에 맞서 움직였지만, 초반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다케다 신겐의 죽음으로 약화되었다. 노부나가는 8월에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몰아냈고, 마쓰나가는 노부나가에게 합류하여 연합군의 다른 구성원들과 싸웠다. 무네요시가 이 전투에 참가했을 가능성이 높다.[3] 그러나 1577년 마쓰나가는 다시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고, 노부나가는 결국 그의 반역적인 가신을 패배시켰다.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 무렵 무네요시는 전투의 세계에서 물러나 야규 마을에 은둔했다.

1564년 미요시가 당주 나가요시(長慶)가 사망하고 젊은 미요시 요시쓰구(三好義継)가 뒤를 잇자, 무네요시가 섬기는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미요시 삼인중(三好三人衆) 등 사이에 대립이 생겨, 곧 미요시 가문 내부를 둘로 나누는 싸움이 되었다. 삼인중은 당주 요시쓰구를 옹립하고, 무네요시의 이전 주군인 쓰쓰이 준케이를 비롯한 야마토 국인(國人)의 대부분이 삼인중과 손을 잡는 등 히사히데는 고립되지만, 무네요시는 히사히데 쪽에 남았다.[30] 히사히데는 열세에 놓이지만, 1567년에 미요시가 당주 미요시 요시쓰구가 삼인중에 대한 불만으로 출분(出奔)하고 히사히데 편에 서면서 간신히 부활한다.[31] 전황은 교착된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히사히데가 전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와 동맹을 맺고, 요시아키와 그를 옹립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상락(上洛)을 도모하자,[32] 무네요시도 히사히데를 따라 요시아키 상락을 위해 힘쓴다. 같은 해 8월 21일에는 노부나가로부터 서장을 통해 상락 준비에 관한 지시를 받는다. 이어 28일에는 노부나가의 중신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信盛)로부터 상락이 연기된 것에 대한 변명의 서장을 받는다.[35]

이러한 서장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 무렵 무네요시는 외부의 노부나가나 그의 중신들에게도 인지되는 존재가 되어 직접 서장을 받고 있다.[36] 무네요시는 이 외에도 히사히데의 주군인 미요시 요시쓰구로부터 직접 감장[37]을 얻고 있으며, 이 시기 마쓰나가 씨의 약화로 인해 상대적으로 존재감을 높이고, 조력자로서 반독립적인 입장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38]

같은 해 12월, 상락을 앞둔 노부나가로부터 야마토와 산조 남부의 국인들에게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그의 아들 히사미치(久通)에 대한 협력을 요구하는 서장이 보내진다.[39] 이 서장은 같은 내용의 것이 여러 개 현존하는데, 야규 가문에는 무네요시에게 보내진 것 외에, 수신인이 「코후쿠지(興福寺) 재진중(在陣衆)」으로 되어 있는 것도 보관되어 있다. 이로부터 이 무렵 무네요시는 히사히데의 군사적 기반의 한 사람으로서 코후쿠지에 진을 친 군세를 이끄는 입장에 있었다고 보인다.[40]

1568년 무네요시 39세 때,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를 수행하여 상락을 하자, 무네요시의 주군인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오다 군과 협력하여 야마토 평정을 추진했다. 그해 10월, 무네요시는 다카하타(高畠)(나라 시 다카하타 정)에서 낙마하여 중상을 입었다.[41]

히사히데는 주군인 미요시 요시쓰구와 함께 요시아키의 막부를 구성하는 일원이 되어 헌신했으나, 곧 오랫동안 적대해 온 쓰쓰이 준케이와 요시아키가 결탁하는 등의 이유로 막부를 이탈하여 요시아키와 적대했다.[42] 겐키(元亀) 2년(1571년) 8월 4일, 히사히데의 지휘 아래 무네요시는 요시아키 측의 쓰쓰이 준케이가 지키는 다쓰이치 성(辰市城)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히사히데 측은 『다몬인 일기(多門院日記)』에 "야마토 국이 시작된 이래"라고 할 정도로 큰 패배를 당했고, 히사히데의 일족과 많은 중신들이 전사했다.[43] 『다몬인 일기』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부상당한 자들 중에 무네요시의 아들("야규 소쿠(柳生息)")도 있었고,[44] 전장에서 총상을 입고 불구가 되었다고 전해지는 장남 겐쇼(厳勝)는 이 전투에서 장애를 입고 생애 내내 야규 쇼(柳生庄)에 은거했다고 보는 견해가 강하다.[45]

같은 해 10월, 히사히데가 산조 남부(山城南部)를 공격하여 나라를 비우자, 무네요시는 히사히데의 아들 히사미치의 명령을 받아 요시아키에 대한 회유의 일환으로 동국(東国)에 사승(使僧)을 보내 이가슈(伊賀衆)에 대한 회유와 오사카 본원사(大阪本願寺)와 이세 나가시마 일향잇키(伊勢長島一向一揆)와의 교섭에 힘썼다.[47] 이 해, 후에 가독을 계승하는 막내아들 야규 무네토시(柳生宗矩)가 태어났다.

2. 5. 은둔과 검술 수련

1570년대 후반, 무네요시는 장군이나 영주가 되려는 야망을 버리고 야규 마을로 은퇴하여 신카게류 검술 훈련에 전념했다.[5] 40대 후반이었던 그의 은퇴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스승 히데쓰나(秀綱)의 죽음, 아시카가 막부와 마쓰나가(松永久秀)의 몰락 등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당시 무네요시가 지은 시에는 신카게류를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한 의구심과 자신감 부족이 나타나 있으며, 심지어 신카게류조차 "돌배"와 같은 효용성에 비유되기도 했다.

무네요시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들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신카게류를 가르치는 데 보냈다. 1580년에 발급된 면허장이 현재까지 남아있다.[63] 1589년에는 후손들을 위한 회고록이자 예법에 관한 논문인 『야규가헌』(柳生家憲)을 저술했다. 1593년에는 불교 재가 수행자가 되어 "석수재 종곤(石舟斎宗厳)"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같은 해, 그는 무술의 유용성, 훈련 및 목표에 대한 내용과 자신의 시로 구성된 『병법백가』(兵法百歌, "전략의 백수")를 저술했다.

1594년, 무네요시의 신카게류와 무토도리(無刀取) 실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충실한 장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알려졌다. 이에야스는 무술에 관심이 많았고, 교토 북쪽 다카가미네(高岳)에서 무네요시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무네요시는 다섯째 아들 야규 무네노리와 함께 시범을 보였다. 신카게류 철학을 설명하고, 류의 일부 가타(型)와 무토도리를 시연했다. 이에야스는 보쿠토를 들고 무네요시에게 무토도리를 시연해 줄 것을 요청했고, 무네요시는 이에야스의 보쿠토를 날려 버리고 이에야스를 넘어뜨렸다.[5] 이에야스는 무네요시에게 신카게류를 가르쳐 줄 것을 요청했으나, 무네요시는 고령을 이유로 아들 무네노리를 추천했다. 이에야스는 신카게류를 배우고 야규 가문을 우대하겠다는 서약에 서명했고, 무네노리는 이에야스를 따라 하타모토(旗本)가 되었다.

같은 해, 야마토(大和)국의 인구 조사에서 야규 마을에 숨겨진 비과세 논이 발견되어, 무네요시의 토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몰수되었다.[3][6] 무네요시는 횬고노스케 도시토시와 노(能)극 곤파루류(金春流) 학파의 수장 다케다 우지카쓰(武田氏勝)에게 신카게류를 계속 가르쳤다.[3]

2. 6. 도요토미, 도쿠가와와의 만남

1594년, 야규 마을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야규 무네요시(세키슈사이)의 신카게류(新陰流)와 무토도리(無刀取) 실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충실한 장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알려졌다.[5] 이에야스는 무술에 큰 관심이 있어 교토 북쪽 다카가미네(高岳)에서 무네요시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무네요시는 다섯째 아들인 무네노리를 데리고 가서 시범을 보였다. 신카게류의 철학과 류의 일부 가타(型) 및 무토도리를 시연했다. 이에야스는 직접 확인하고 싶어 나무 칼인 보쿠토를 들고 무네요시에게 무토도리를 시연해 줄 것을 요청했고, 무네요시는 성공적으로 이에야스의 보쿠토를 날려 버리고 이에야스를 뒤로 넘어뜨렸다.[5]

감명받은 이에야스는 무네요시에게 신카게류를 가르쳐 줄 것을 요청했지만, 무네요시는 고령을 이유로 거절하고 아들 무네노리를 추천했다. 이에야스는 이에 동의하고 신카게류를 배우고 야규 가문을 우대하겠다는 서약에 서명했다. 무네노리는 이에야스와 함께 가서 하타모토(旗本, 깃발병)의 직책을 받았다.

같은 해, 야마토(大和)국의 인구 조사에서 야규 마을에 숨겨진 비과세 논이 발견되어, 처벌로서 무네요시의 토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몰수되었다.[3][6]

분로쿠 3년(1594년) 5월, 부젠 국의 다이묘인 구로다 나가마사의 주선으로 교토 다카가미네의 오고야에서 도요토미 정권의 중신인 오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초대되어, 이에야스 본인에게 무도취의 술기를 보였다.[62] 이때 이에야스는 그 자리에서 소겐에게 입문 서약서를 제출하고, 200석의 봉록을 지급했다.[62] 소겐은 이에야스로부터 자신의 곁에서 시중들 것을 요청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양하고 함께 있던 다섯째 아들 야규 무네노리를 추천했다고 『야규가사화』에서는 전하고 있다.

이 무렵 소겐은 이에야스와 같은 오대로인 모리 테루모토에게도 병법을 가르치고 있었으며, 분로쿠 4년(1595년)부터 수년간 여러 권의 전서를 수여했다.[63] 게이초 4년(1599년) 3월, 테루모토에게 전수 인가로서 기서문[66]을 주었다.

2. 7. 말년

1597년, 무네요시의 손자이자 후계자였던 야규 스미토시가 조선에서 전투 중 사망하였다.[1] 1599년, 무네요시는 유서를 작성했는데, 가문의 어려운 상황을 보여주듯 장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다도 도구를 팔 것을 명령했다.[1]

1600년, 이시다 미쓰나리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군대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맞붙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시모쓰케 국(현재의 도치기현)에서 우에스기 씨족의 반란을 진압하려다 이시다 미쓰나리가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아들 무네노리를 야규 마을로 돌려보내 아버지 무네요시에게 야마토 지방에서 군대를 모을 것을 요청했다. 71세의 무네요시는 직접 군대를 이끌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무네노리가 군대를 이끌고 이에야스에게 합류하여 전투 하루 전에 도착했다.[1] 이에야스의 군대가 승리하면서 야규 가문은 선조 대대로 내려오는 땅을 되찾는 보상을 받았다.

1602년 무네요시의 넷째 아들 고로에몬 무네아키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섬기다 히데아키 사후 로닌이 되었고, 요나고 영주 나카무라 카즈타다의 측근인 요코타 무라아키에게 받아들여졌다. 1603년, 나카무라는 요코타가 자신을 모의하고 있다고 믿어 그를 죽였다. 요코타의 가족과 야규 무네아키는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고, 무네아키는 총에 맞아 죽기 전까지 18명을 베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나이 35세였다.[1]

1604년, 무네요시의 손자 야규 토시토시는 가토 기요마사를 섬겼으나, 고참 가신들과의 문제로 1년 만에 기요마사의 봉사를 떠났다.[1] 토시토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무샤 슈교를 하며, 다양한 스승들과 대련하고 그들로부터 배웠다. 1606년, 무네요시는 토시토시를 야규 마을로 급히 소환했다. 건강이 악화된 무네요시는 히데츠나로부터 받은 전승 면허와 삽화가 그려진 두루마리를 포함한 모든 신영류 자료를 손자에게 물려주었다.[1] 같은 해, 야규 세키슈사이 타이라노 무네토시는 78세(만 77세)의 나이로 야규 마을에서 사망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우에스기 가게카쓰 토벌을 위해 아이즈에 출병(1600년, 게이초 5년 7월)하자, 이시다 미쓰나리 등의 반(反) 도쿠가와 세력이 오사카성에 들어왔다. 도쿠가와 측에 종군하고 있던 무네요시의 아들 무네토시는 이에야스로부터 무네요시에게 보내는 편지[67]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 쓰쓰이 준사이와 협력하여 야마토의 호족들을 모아 이시다 측을 견제하라는 주군의 명령을 아버지에게 전했다.[68] 무네요시는 무네토시와 협력하여 이에야스의 명령을 완수했고, 같은 해 9월 13일 무네토시는 이에야스에게 무사히 공작을 마쳤다는 보고를 했다.(『도쿠가와 실기』)

무네토시는 세키가하라 전투 본전에 이에야스의 본진에서 참전하여 도쿠가와 측이 승리하자, 야규 쇼의 본령 2천 석을 하사받았다. 야규 가문은 마쓰나가 데루모토와 적대하는 형태가 되었지만, 이후에도 무네요시의 제자 야규(오노) 마쓰에몬이 마쓰나가 가문에 봉직했으며[69], 무네토시가 데루모토의 아들 히데나리에게 전서를 주는 등 관계는 계속되었다.

구마모토번가토 기요마사의 요청에 따라 장남 겐쇼의 아들 류생 토시이와를 가토 가에 종사시켰다.(1603년, 게이초 8년) 무네요시는 토시이와에게 「신음류 병법 목록사」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토시이와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어도 3번까지는 용서해 줄 것을 기요마사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토시이와는 출사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동료와 다투다가 그를 베고 가토 가를 그만두고 전국 수행의 여정에 나섰다.[70]

이듬해(1604년, 게이초 9년), 무네요시는 토시이와에게 모든 것을 전수하는 인가장을 보냈고, 토시이와가 류생 쇼에 돌아왔을 때에는 자필 목록 「몰자미 수단 구전서」와 함께 큰 태도 한 자루와 우에스미 노부쓰나로부터 받은 인가장·목록 일체를 함께 수여했다.[71]

1606년(게이초 11년) 2월, 전투 부상으로 신체에 장애가 있었다고도 전해지는 장남 겐쇼에게 「몰자미 수단 구전서」와 모든 것을 전수하는 인가를 수여했다. 이어 무네요시는 도쿠가와 가에 봉직하고 있던 막내아들 무네노리도 에도에서 불러들여 모든 것을 전수하는 인가를 주었다고도 하지만[72] 이 인가장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해 4월 19일, 류생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80세였다. 법명은 「방덕원전고단주자사장운종엄거사」이다. 중궁사(현 나라현 나라시)에 매장되었다.[10] 후에 무네노리가 류생가의 보제사로 방덕사를 창건했기 때문에 방덕사에 묘소가 있다.

3. 야규 신카게류

가미이즈미 히데츠나는 제자들과 함께 교토로 향하던 중, 이세 국에서 지방관 키타바타케 토모노리의 추천으로 무네요시와 대결하게 되었다.[4][5] 여러 기록에 따르면 무네요시는 대결에서 패배하고 히데츠나의 제자가 되었다.[1][4]

무네요시는 히데츠나를 야규 마을로 초대하여 1년 가까이 수련했다. 히데츠나는 무네요시에게 무장한 상대에게 무기를 들지 않고 맞서는 무토도리(無刀取)를 연구하도록 과제를 주었다. 무네요시는 이 연구에 전념했고, 히데츠나가 돌아왔을 때 그 기술을 성공적으로 시범 보였다. 히데츠나는 무네요시에게 신카게류(新陰流)에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나타내는 인가장(印可状)과 이를 가르칠 권한을 주었다.[4][5]

무네요시는 1567년 히데츠나 방문 이후, 1570년부터 1572년까지 교토에서 생활하고 일했다. 1572년 히데츠나는 마지막으로 야규 마을을 방문하여 얼마 동안 머문 후 고즈케 국으로 향했다. 그는 1577년에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1570년대 후반 무네토시는 장군이나 막부의 영주가 되려는 야망을 버리고 야규 마을로 은퇴하여 신카게류(新陰流) 교육과 훈련에 전념했다.

무네토시는 자신의 아들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신카게류를 가르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1589년 그는 후손들을 위한 회고록이자 예법에 관한 논문인 『야규가헌』(柳生家憲)을 저술했다. 1593년에는 불교 재가 수행자가 되어 "석수재 종곤(石舟斎宗厳)"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같은 해, 그는 무술의 유용성, 훈련 및 목표와 같은 주제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시로 구성된 『병법백가』(兵法百歌)를 저술했다.

1594년 야규 마을에 숨겨진 비과세 논이 발견되면서 무네토시의 토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몰수되었다.[3][6] 무네토시는 계속해서 신카게류를 가르쳤다.[3]

인가장·목록·입문의 서약서가 현존하는 문하는 다음과 같다.

당주 자신이 문하에 입문한 집안 및 당주
다이묘가에 섬긴 문도
기타 문하



인가장·목록이 현존하지 않는 문하는 다음과 같다.[77]

다이묘가에 섬긴 문도
기타 문하


3. 1. 무토도리(無刀取)

1594년, 야규 마을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무네토시의 신카게류와 무토도리(無刀取) 실력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충실한 장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알려졌다. 이에야스는 무술에 큰 관심이 있었고, 교토 북쪽 다카가미네(高岳)에서 무네토시와 만남을 주선했다. 무네토시는 다섯째 아들인 무네노리를 데리고 와서 시범을 보였다. 신카게류의 철학을 설명한 후, 류의 일부 가타(型)와 무토도리를 시연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직접 확인하고 싶어했고, 나무 칼인 보쿠토를 들고 무네토시에게 자신에게 무토도리를 시연해 줄 것을 요청했다. 무네토시는 성공적으로 이를 시연하여 이에야스의 보쿠토를 날려 버리고 이에야스를 뒤로 넘어뜨렸다.[5] 감명받은 이에야스는 무네토시에게 신카게류를 가르쳐 줄 것을 요청했다. 무네토시는 자신의 고령을 이유로 거절하고 아들 무네노리를 추천했다. 이에야스는 이에 동의하고 신카게류를 배우고 야규 가문을 우대하겠다는 서약에 서명했다.

4. 평가 및 영향

야규 무네요시는 뛰어난 검술 실력과 신카게류의 발전 및 확산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사후 아들 야규 무네노리는 야규 가문의 영지를 상속받아 무네요시를 기리는 호토쿠지 절을 건립했다.[3] 무네노리의 아들 렛슈도는 이 절의 주지가 되었다.[3] 무네요시의 저택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이 절은 현재까지 남아있다.

도쿠가와 가문의 후원을 받으며 야규 가문은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 무네노리는 하타모토이자 검술 사범으로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신임을 얻었다.[3] 야규 마을과 그 주변 지역은 야규번이 되었고, 무네노리는 초대 번주가 되었다. 무네노리와 그의 아들 야규 쥬베이 미쓰토시는 뛰어난 검술 실력으로 많은 제자를 두었으며, 일부는 자신만의 유파를 창시하기도 했다. 무네노리의 계보는 에도 야규로 알려져 있다.

무네요시의 장남 토시카쓰는 장애로 인해 영주에게 고용되지 못했지만, 그의 아들들은 명성 있는 검술 사범이 되었다. 막내 켄자에몬은 센다이번의 번주 다테 마사무네의 검술 사범이 되었고,[3] 차남 토시토시는 나고야의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검술 사범이 되었다. 토시토시의 계보인 오와리 야규는 에도 시대 내내 현재까지 신카게류를 가르치고 전승해 왔으며, 현 당주인 야규 코이치는 토시토시 계보를 통해 무네요시의 13대 직계 후손이다.

무네요시의 사후, 가독은 도쿠가와 쇼군가에 봉직한 아들 무네노리가 계승했다. 무네노리는 2대, 3대 쇼군에게 신카게류를 전수했고, 그의 문하생들도 여러 번에 채용되면서 야규 가문의 신카게류는 "천하 병법의 대가"[73]로 칭송받을 정도로 번성했다. 무네노리는 막정에 관여하여 다이묘가에 올랐다. 메이지 유신 이후, 무네노리의 자손들은 신카게류 전승을 폐지했지만,[74] 장남 토시요시의 아들로 오와리 도쿠가와가에 봉직한 토시토시의 자손들이 신카게류를 현대까지 이어오고 있다.

무네요시는 의사 구직세도삼(曲直瀬道三)과 친분이 있었으며, 도삼이 무네요시와 매창(梅窓) 두 사람을 상대로 건강 관리 방법을 문답 형식으로 이야기한 『양생어(養生物語)』가 있다.[75] 또한, 무네요시는 마쓰나가 야스히데의 가신이자 "위대한 검술가"로 평가받은 유키 충마사(結城忠正)와 친분이 있었고, 류생가에 전해지는 "좌도(左太刀)"라는 자세는 충마사로부터 전해받은 것이라고 한다.[36]

무네요시의 문하에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

인가장·목록·입문의 서약서가 현존하는 문하
다이묘가에 섬긴 문도
인가장·목록이 현존하지 않는 문하[77]


5. 창작물에서의 등장

야규 무네요시는 다른 많은 일본 역사 속 위인들처럼 문학, 영화, 비디오 게임 등 다양한 미디어에서 인기 있는 인물로 다루어졌으며, 그에 대한 과장된 이야기와 전설도 많이 생겨났다. 야규 가문의 묘지 근처 야규 마을에는 일도석(一刀石)이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두 동강 나 있다. 아마도 낙뢰나 지진으로 갈라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전설에 따르면 무네요시가 자신의 검으로 이 바위를 쪼개었다고 한다.[6]

무네요시는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의 소설 무사시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이 소설은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의 삶을 각색한 것이다. 소설에서 젊고 거친 무사시는 유명한 검객인 무네요시를 찾아가 그를 물리쳐 이름을 날리려 한다. 그러나 그때 무네요시는 이미 늙고 병들어 있었고, 결투 대신 무사시는 무네요시의 정신적 힘에 경외감을 느끼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학습의 기회를 얻는다. 이러한 만남은 요시카와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만화 바가본드에서도 묘사된다.

오니무샤 비디오 게임 시리즈에서 무네요시는 주베이(十兵衛)라는 이름으로 오니무샤2: 사무라이의 운명의 주인공이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야규 마을을 파괴한 후, 주베이는 그들을 복수하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그는 오니무샤 블레이드 워리어즈에도 등장하며, 오니무샤3: 데몬 시즈에서는 은둔해 있다. 오니무샤: 꿈의 여명에서는 은퇴하여 주베이라는 이름을 손녀인 아카네에게 물려주고, 세키슈사이(関宿斎)로 불린다. 그의 아들인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는 악당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신하가 되었고, 이 때문에 무네요시는 아카네에게 아버지를 죽이도록 명령한다.

페이탈 퓨리 비디오 게임 시리즈의 캐릭터 야마다 주베이(山田十兵衛)는 무네요시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영화 '닌자 전쟁(1982)'에서 야규 신자에몬(柳生新左衛門)으로 출연했다.[9]

비디오 게임 니어(Nioh)에서는 검술 신비술 기술을 해제하기 위한 서브 퀘스트 보스로 등장한다.

2003년 대하드라마 시리즈 무사시(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의 소설 무사시를 바탕으로 함)에서 세키슈사이는 후지타 마코토(藤田まこと)가 연기했다.

무네요시는 모바일 게임 페이트/그랜드 오더에서 세이버 클래스 서번트로 등장하며, 야규 타지마노카미(柳生但馬守)로 알려져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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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日本の城がわかる事典「柳生城」の解説 https://kotobank.jp/[...] kotobank 2021-11-14
[3] 서적 Teihon Yamato Yagyū Ichizoku Shinjimbutsu Ōraisha 1994
[4] 서적 Yagyū Shinkage-ryū Engi Shinjimbutsu Ōraisha 1995
[5] 서적 Gyokuei Shūi Shinjimbutsu Ōraisha 1995
[6] 서적 Yagyū-no-Sato Kansai Insatsu K.K. 1983
[7] 웹사이트 Official site, Yagyū Shinkage-ryū - Yagyū-Kai http://yagyu-shinkag[...]
[8] 서적 Yagyū Ibun K.K. Elm 1974
[9] 웹사이트 Full Cast & Crew of The Ninja Wars (1982) https://www.im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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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간행물 新大和人物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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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서적 史料 柳生新陰流〈上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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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서적 史料 柳生新陰流〈上巻〉
[63] 논문 柳生宗厳兵法伝書考 -毛利博物館所蔵資料を中心として- https://hdl.handle.n[...] 1995
[64] 서적 今村嘉雄1994
[65] 서적 相川司 2004
[66] 문서 柳生但馬守入道宗厳起請文
[67] 서적 史料 柳生新陰流〈下巻〉
[68] 서적 今村嘉雄1994
[69] 서적 山口県剣道史
[70] 서적 柳生厳長1957
[71] 서적 正傳新陰流 1957
[72] 서적 正傳新陰流 1957
[73] 서적 撃剣叢談 武術叢書 1790 # 寛政2年は1790年
[74] 서적 (제목 없음) # 추가 정보 필요 2010
[75] 서적 史伝健康長寿の知恵⑤健康への道 養生のすすめ 第一法規出版 1989
[76] 서적 (제목 없음) # 추가 정보 필요 2012
[77] 서적 武芸流派大事典 : 増補大改訂
[78] 서적 柳生新陰流縁起 史料 柳生新陰流〈下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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